주의 종언
(w. 청서님의) coc 팬메이드 시나리오 <종의 기원>과 그의 후속인 <종의 __>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직간접적인 살해 서술, 자살, 유혈 등의 비윤리적인 요소를 주의해 주세요.
주의 종언
아기는 커서 무슨 사람이 되었을까.
엄마, 그다음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과 언어가 잇따랐을 것이다. 하늘을 알았겠지. 그것이 늘 맑지만은 않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주먹에 바르쥔 흙을 입에 넣으려는 것을 부모가 제지했을 터. 십 대가 되어서야 가득 부푼 불면의 뒤척임을 알게 될 것이었으며, 신념을 두고 기꺼이 사람과 갈등했을 것이다. 언젠가, 부모를 넘어서는 자신의 키를 실감하게 될 것이었다.
"교주님, 교주님... 아아, 우리 아이를.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그렇기에 아기는 자신의 목소리와 부모의 이 기운 없는 울음소리가 서로 닮아있다는 것을 끝내 깨달아야만 했다.
글레디스는 그 모든 가능성을 품고 헐떡이는 심장을 끊어버리고 만 것이다. 가슴을 덮었어야 한 옷은 무참하게 찢어져, 날 선 칼날로부터 아기를 보호하지 못했다. 부모는 교주의 창백한 손과 그 의상에 묻어난 선홍색 피, 바닥으로 허망하게 떨어지는 신선한 피를 내려다보며 영문모를 눈물을 흘린다.
교주가 품에 안은 육신에 감히 손 뻗지 못하는 두 사람을, 글레디스는 떨리는 표정을 굳히고 돌아본다.
"왜 울고 있나요."
스테인드글라스로부터 반사된 빛이 글레디스의 어둑한 뺨과 구두코를 새빨갛게 적신다.
"비록 재물의 시기는 다 차지 않았으나, 신께서는 아이를 받아주셨습니다. 신이 원하셨어요."
교주가 엉성하게 변명하지만 줄곧 긴 나무 의자에 앉아 손을 모으고 있던 신도들은 격렬하게 호응한다.
내 아이를 빚어 만든 피. 한때 내 몸속을 돌던 피다... 교주의 발치로 주워 담을 수 없는 피가 쏟아진다.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던 부모는 잔뜩 엎드려 경배한다.
"감사합니다, 교주님. 감사합니다! 우리 아기에게 천국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겁에 질린 눈물을 가리기 위함이라는 것을 안다. 글레디스는 고개를 기울이고, 눈을 감아 동공을 감추었다.
* * *
교주님, 신이 보내주신 자여. 아아, 신이시어. 흥분한 신도들로 인해 낡은 의자에서 흐느낌이 끊임없다. 귀에서마저 피가 흐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교주를 호명한 것은 그의 신도 뿐만이 아니었다. 글레디스는 제 최측근 간부 둘을 돌아본다.
"아기야 다시 구하면 되고. 이스마엘, 브란다, 왜 가만히 있는 건가요. 나는 부모를 올려보내라고 한 적 없는데."
"제사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아기의 숨을 이렇게 일찍이 끊으셨습니까? 이대로라면 큰 착오가..."
"그대들이 내게 주둥아리를 올릴만한 존재인 것만 같지."
흔들림 없는 숨에 억눌린 그것이 담겨있다.
"아기는 카르코사로 떠나보냈습니다. 빈 껍데기에 미련을 두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또 없다는 사실을 잘 알 텐데, 이스마엘. 신이 원하셨다고 말했거늘. 나는 신과 관련한 일에는 화를 잘 누그러뜨리지 않아요. 신앙심을 해치기 전에 돌려보내세요."
간부 이스마엘은 함묵한다. 그러나, 미사보 속에 잠시간 미치광이의 비틀린 웃음이 머물었을지 모른다.
글레디스는 부모가 몸을 일으켜 신도들에게로 비틀비틀 기어들어갈 때까지, 아기의 몸에서 한참 동안 칼을 뽑지 못했다.
벌어질 상처를 통해 조금이라도 남은 체온이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피와 물감을 구분 못하는 새카만 시야가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그날, 부모는 카르코사로 떠났다.
새벽은 온 사위가 어두웠다. 잠을 깨운 흐느낌이 제 입으로부터 새고 있었다. 가슴을 죄는 통증에 몸이 먼저 겁에 질려 있던 것이다. 이제 와서 낯설어진 제 종의 이름을 신음으로써 불러낸 것도 같다. 심장부로부터 전해지는 압력이 온 신경에 뻗어 내리고, 곧장 마비된 글레디스는 숨을 쉬기 위해 손을 몇 차례씩 쥐었다 편다.
나는 기어코 그들이 바라던만큼 망가진 것인가. 재물을 들먹이는 횡포를 견딜 수 없다 못해 눈 먼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의 공포와 무너진 표정을 받아낼 나약한 존재로써 아기를 죽였다. 나의 산재물, 가엾은 아기. 나는 공양할 아기의 심장을 찌르고 말았다. 감히 어떤 인간이 그 생을 끊어 운명을 좌우하는가. 살인에 둔감한 광인들은 교주의 엉성한 근거에 대고 환호했다. 순간,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판단에 이르고 말았다.
안일한 실수였다.
글레디스는 저항할 수 없는 기시감을 마주한다. 옛 친구 테오도르가 이 성의 존재조차 모를 시절, 글레디스는 유독 창밖으로 날아가려는 새를 놓아줄 수 없었다. 글레디스가 새를 잡기 위해 제 키보다 조금 낮은 난간을 밟고 넘어설 때마저 그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종들은 끝내 정원 잔디 위로 축 늘어져 고즈넉한 피웅덩이를 베고 누워있는 작은 사제 글레디스를 목격하고 말았다. 비어나가는 혈관 속에 졸음이 차고 넘쳤다.
의식을 잃기 전, 울긋불긋한 깃털이 가득하던 아버지의 손을 보았었다.
나는 왜 그랬지. 깨어난 직후에도 새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자 생각했다. 나는 무얼 하고 있지.
한참을 이불속에서 허덕이던 글레디스는 끔찍한 비명을 모두 억누르고, 숨 가쁜 눈물을 대신 흘려내고서야 몸을 웅크린다.
그제서야 메마른 침대시트의 익숙한 촉감이 만져졌다.
"나는, 곧 죽습니다." 글레디스는 텅 빈 자리에 대고 중얼거린다. 안면이 일그러진다. 이 외면할 수 없는 감각을 무어라 정의하는지 안다. "나를 다급히 죽여주세요..."
숨이 막 트인 목소리가 떨린다. 새가 주인을 두고 어딜 멀리 떠나가겠는가. 어째서 뛰어들었는가. 주인은 어리석었다. 뭘 모르고 뛰어들어 죽게 만든 책임이 있다.
자책이라도 하지 않으면 억울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교주는 강박적으로 스스로를 몰아가다 흐느끼기에 이른다.
글레디스는 나약하게 떨리는 상체를 일으킨다. 몸을 억누르는 졸음이 초점을 앗아간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은 눈 앞에서 비척비척 흔들린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미지근한 액체가 거뭇거뭇 흘러내리는 왼쪽 팔뚝이다. 아기가 쏟은 피보다도 창백한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글레디스는 입가에 맺힌 피를 닦아내고 앞으로 내민 왼손을 거둔다. 글레디스는 기어코 테오도르가 찾아왔을 때, 자신이 그 자리에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을 관뒀다.
지쳐버린 몸이 느린 심박수를 재우쳤다. 글레디스는 이 쉼 없는 수마가 기어코 그의 목을 조를 것을 안다. 피로를 빌미로 숨을 쉬는 법마저 천천히 망각하게 할 것이다. 모든 장기가 썩어나가 끝내 뼈만 남을 때까지도 좀처럼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겠지.
이것은 임종의 징조다.
글레디스는 더 이상 온갖 소박한 장식과 다과와 식탁,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앉아있었을 자신의 감정을 뚜렷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제 발 아래 깔려있었을 꽃밭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손을 데이면서까지 파이를 굽는 부모의 사랑은 또 무엇이었는가.
글레디스는 이제 이틀밖에 살지 못한다. 눈을 비빌 틈 하나 없이 서벅서벅 스쳐내려온 캐노피가 글레디스의 뺨을 간질인다.
잔이 몰아낸 잠이라기엔 캐노피의 희미한 뒤척임이 전부로, 가을이라기엔 그 흔한 답엽의 기척이 없었다. 차다고 말할 수 없는 공기가 제 자리에 얌전하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시면 이즈렐이......"
잔이 변덕으로 창을 열지 않았다. 무엇보다, 줄곧 캐노피라고 느꼈을 만큼 부드러운 숨소리가 귀에 와닿는다.
잔이 아니구나. 교주의 머리카락을 주우러 온 거구나. 이름 모를 미치광이야. 지겹게도 내 몸을 살피러 온 거니. 살을 지질만한 촛대는 이곳에 없단다.
교주의 잠을 깨우는 것은 너였어야 한다. 죽을 만큼 보고 싶던 나의 미련한 종. 나의 친구 테오도르. 내 남은 생은 고작 이틀이다. 그 이내에 나를 찾아올 순 없겠지.
사유가 무엇이 되었든 글레디스는 죽는다. 더 이상 그 누구도 표정과 목소리를 흔들지 못한다. 글레디스는 죽기 전까지 교주를 완벽하게 연기할 것이다. 이 순간을 위해 키워온 무시 못할 소양이 아닌가.
글레디스는 무거운 속눈썹을 떨며 죽음의 잠을 밀어낸다.
깨어나보니 이른 낮이었다.
새카만 미사보가 몸을 숙여 내려다보고 있었다.